바람이 남긴 흔적 - 단편3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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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파리에서의 작별





한참을 자고 있는데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나는 잠을 깨버렸다. 실눈을 뜨고 소리가 나는 곳을 보니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을 한 강대리가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고 있다. 진짜 어이없는 일이다.

나에게는 오늘 오후를 파리의 관광지에서 보내고 또 제네바에 도착하면 호텔을 정하기 가지 긴 하루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나에게는 아침에 늦잠을 선택하여 즐길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강대리의 생각은 이러는 나를 철저하게 방해하는 것 같다.

도대체 강대리의 저 심뽀는 뭘까? 우리에게는 각자 방을 따로 하나씩 갖고 있다. 이렇게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일은 자기 방에 건너가서 하지 않으면 안되나? 예의가 없는 것은 아닐텐데. 아니면 강대리가 불만을 나타내는 것일까? 말도 안 되는 이 일을 어떻게 하지?

그뿐 아니라 강대리는 가운을 걸치더니 창문 두 개를 모두 활짝 열어버린다. 가을 아침의 쌀쌀한 공기와 매캐한 냄새가 방안을 가득 메우는 데에는 시간이 별로 많이 걸리지 않을 것 같다. 벌써 머리가 맑아진다. 나는 벽 쪽으로 돌아누워서 잔뜩 웅크리고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강대리가 와서 이불 속으로 두 손을 넣고 내 몸 곳곳을 손으로 간지럽게 한다.



"뭐야아. 아침부터 웬 애교야?"
"애교라니? 잠 좀 자자."

"안잔다는 것 다 알거든요. 빨리 안일어나?"
"왜 새벽부터 난리굿인데? 피곤하지도 않아?"

"새벽 좋아하시네. 지금 9시 반이 넘었어.
12시에 방 비워달랬다며? 짐 안싸?"

"싸."
"그럼 얼른 일어나."



강대리가 일찍 일어나서 나를 깨우느라고 일부러 야단 법석을 부린 것인가? 9시 반이라는 강대리의 말에 나에게 불만은 없어졌다. 나는 일어나면서 전화기에 맞춰둔 알람을 껐다. 강대리가 가운을 가져와서 내 몸을 감싸며, 나에게 뒤에서 백허그를 해온다.



"밤이 짧아도 너무 짧다. 더 길어도 되는데."
"밤은 충분히 길었어. 오빠가 여자들 꽁무니나 따라다니느라고 바빴지."

"얘가 아침부터 왜 이래? 언제 일어났어?"
"나도 이제 일어나서 막 샤워했어. 비기싫어 죽겠거든요?"

"나를 미워하는 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구덩이에 던져질 것이다. 하하."
"이 오빠가? 시방 구신 씨나락 까드시나?"



나는 테이블로 가서 노트북을 켜고 포털 싸이트에 있는 내 개인 이메일을 열었다. 스펨 말고도 스무개가 넘는 이메일이 들어와있다. 저것을 읽다 보면 또 답장을 보내야 하고, 또 그러다 보면 오늘 하루가 다 갈 것 같다. 나는 그냥 노트북을 끄고, 욕실로 샤워하러 들어갔다.


샤워를 마치고 욕실을 나오니까 다행히도 창문은 닫겨 있고, 방 안은 커피냄새로 가득하다. 강대리는 테이블에 앉아서 화장을 하느라고 열심이다. 나도 옷을 갈아입고, 커피메이커에서 커피를 따라서 홀짝이면서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별로 많지 않아서 금방 끝내고 내 캐리어와 가방을 문 앞에 세워둔다.

나는 식어가는 커피를 버리고 새로 따라서 창가에 서서 바깥 세상을 내다본다. 지금 엠마는 일어났을까? 셀린과 전화를 하겠다고 했는데 어떻게 됐을까? 일요일 아침의 고요함이라고나 할가? 간간이 오고 가는 차들, 천천히 산책하는 노인들, 벌써 빛이 바랜 낙엽이 지기 시작하는 가로수, 맑고 푸른 하는 그리고 한가로운 구름. ..

도시와 자연이 모두 일요일 아침을 즐기고 있다. 재충전을 위해서 일까? 아니면 전능하신 신과 대화중일까? 내가 독실한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거친 세상에서도 일요일 아침에 느낄 수 있는 이것이야 바로 신이 내린 고요와 여유가 아닐까? 나도 언젠가는 반드시 신앙을 가질 생각이다. 내가 신 앞에 무릎을 꿇을 그 날이 언제가 될지.



화장을 끝낸 강대리가 자기 방으로 나를 데리고 간다. 그녀도 옷을 갈아입고 짐을 꾸린다.



"오빠, 효원이가 보낸 메일 읽었어?"
"아니."

"사진 찍은 것을 보내달라는데, 있어야 보내주지."
"그 동안 사진도 안찍고 뭐했어?"

"사진은 호텔 방에서 찍냐?
사진 찍을 만한 곳으로 오빠가 나를 데리고 나간 적 있어?"

"어제 셀린이랑 왜 안놀았어?"
"걔? 도대체 말이 통해야 놀죠."

"영어로 잘 하던데?"
"내가 할 줄 아는 말 몇 마디로 어떻게 놀으라고?"

"아하. 친절한 셀린이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는데 선미가 못알아들었구나?"
"한두번이라야지. 쪽팔려서 도저히 같이 못있겠더라."

"셀린은 그렇게 생각 안할껄."

"오빠가 어떻게 알아? 혹시 밤에 따로 만났어?
도대체 몇 년을 만나고 온 거야?"

"십오년 만났다 왜?
거룩한 일요일 아침에 웬 욕질이니?"



나는 엠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엠마, 일어났어?"
"사랑해. 이 말을 하려고 나도 상수에게 전화하려던 참이었는데."

"나도 엠마를 사랑해. 그런데 셀린은?"
"너의 호텔 앞에서 12시 정각에 만나기로 했어. 나도 이제 집을 나서려고."

"그럼 기다릴께."
"상수. 너 우산 가진 것 없지?"

"없는데? 왜 그러는데?"

"일기 예보를 보니까 오후 늦게 비가 온다는데.
내가 내 집에 있는 우산통을 통째로 싣고 갈께."

"열 개는 너무 많을껄?"
"나 혼자 사는데, 열 개는 무슨 열 개? 하하."



나는 혼자 내 방으로 와서, 짐을 복도에 내놓고, 옷장과 침대를 정리하고 강대리의 방으로 갔다. 그녀도 짐을 모두 챙겼다.


우리는 짐을 들고 리셉션으로 내려가서 체크아웃을 했다. 결제하는 여직원이 하얀 이를 가지런히 보이며 웃는다.



"우리 호텔 마음에 드셨어요?"

"모든 것이 정말 부족함이 없이 훌륭했어요.
며칠만 더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왜요? 바쁘세요?"
"당신처럼 아름다운 여자와 커피 한잔도 마시지 못할 정도라니까요. 하하."

"다음에 또 오시면 되죠.
또 예약하실 때에는 저를 통해서 하시면 제가 VIP 고객으로 처리해드립니다."

"커피 예약?"
"방 예약인데요. 하하."




나는 그녀에게 미리 준비한 막대기 쵸콜렛 한 통을 주었다. 그녀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핀다.



"당신의 친절을 잊지 않을께요.
저도 잊지 말아주세요."

"어머. 감사해요."
"천만에. 아주 작은 것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한 달 내내 쵸콜렛 걱정은 안해도 되겠어요. 하하."



그녀는 나에게 자기 이름이 적혀있는 명함을 준다. 시간만 있었더라면 20대 중반의 풋풋한 이 여인과 아이스크림을 빨면서 쎈느 강변을 산책하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을텐데. 안타깝다. 진심.



"오후 비행기를 타십니까?"
"저녁 6시. 제네바행."

"제가 예약 확인을 해드릴까요?"
"그럼 고맙죠. 여기 배행기 표 있어요."

"지금 나가시면 그 때가지는 뭐하십니까?
가실 곳이 없으시면 시간을 연장해드릴까요?"

"아름다운 파리에 갈 곳이 없다뇨?"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했습니다."

"괜찮아요. 전혀 미안해 하실 필요 없어요.
미녀는 무엇을 하든 무죄잖아요? 하하."

"예. 그럼 그 미녀가?"
"당신이죠. 하하."



옆에 서있던 강대리가 내 팔을 잡으며 살짝 꼬집는다. 강대리는 생글생글 웃으며, 마치 키스라도 할 듯이 얼굴은 내 뺨 가까이로 입을 가져온다. 그런데 독기를 품은 말을 뱉는다. 한 여인이 천사와 악마, 이 두 가지의 역할을 동시에 감쪽같이 그리고 완벽하게 해낸다. 그것도 공공장소에서 말이다. 이것은 오로지 세종대왕님의 은혜이다.


"오빠는 그 새 또 작업질이야?"
"야아. 방값 계산했거든요? 이제 비행기 예약을 확인해주겠대."

"계산하면 카드 긁고 고맙다고 하면 끝이지.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루 종일 하는데?"
둘이 뭘 주고 받았거든요? 내가 똑똑히 봤거든."

"어휴. .. 조용히 좀 해라.
선미가 지금 여기서 불어를 못하고 한국어를 한다는 것이 정말 다행인 줄 알아라."

"나쁠 때도 있는데, 어쩌다 이렇게 편하고 좋을 때도 있네.
나는 그 사실을 서울에서는 몰랐는데, 여기 와보니까 뼈에 사무치게 감사하다. 하하."

"살면서 이것 저것 다 배우는거야."

"오빠만 나쁜 짓 안하면 내가 그런 사실까지 왜 배우냐?
안그래도 골치 아픈 세상이구만."

"네가 모를것 같아서, 깨달으라고 일부러 큰 마음 먹고 그랬거 읍. .. 으읍. .."




갑자기 강대리가 내 입술에 키스해온다. 강대리가 두 눈을 꼬옥 감고 이렇게 과감하게 용기를 낸 것이다. 아마도 파리의 여자들이 하는 것을 따라 하는 것 같다. 아니면 여직원에게 경고를 날리고 있는 중일까?



"하쭈. 선미도 제법이네?"

"손님. 비행 예약에는 아무 이상 없답니다."
"고마워요."



해맑은 미소가 가득한 그녀의 얼굴과 결코 떨어지기 싫었지만, 그녀는 옆에 있는 남자 직원에게 우리 짐을 가리켰다. 그는 우리 짐을 문으로 날랐다. 나는 그녀에게 아쉽게도 진심어린 작별 인사를 하고, 강대리와 함께 도로로 나왔다.



"저기 빨간 차 트렁크 옆으로 부탁해요."



바로 옆 모퉁이에 셀린의 차가 보인다. 그는 우리 짐을 셀린의 차 옆으로 날라온다. 나는 그의 손에 2유로짜리 동전 두 개를 건네주었다.



"미안. 지폐가 없네요."
"대단히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시고 또 오십시오."

"반드시 또 올 테니까 그 때가지 열심히 일하세요. 하하."
"저도 기다리겠습니다."



셀린이 차에서 내려서 차의 트렁크를 열자, 그는 우리 짐을 모두 실었다. 셀린이 강대리와 볼에 키스를 교환한다. 그런데 그녀는 나에게 와서 나를 안고 내 입술을 빨았다. 강대리가 놀라는 눈을 한다.

나는 그와 악수를 했다. 그러나 강대리는 그와 악수를 하지 않는다. 그는 약간 머뭇거리는 눈치를 하더니 호텔로 돌아갔다.

엠마의 차도 도착했다. 엠마는 차에서 내려서 셀린과 포옹을 하고, 볼에 키스를 교환한다. 강대리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엠마는 나를 안고 우리는 입술을 빨면서 제법 오래 키스했다. 강대리가 헛기침을 해서, 셀린은 키득거리고 웃었고, 나와 엠마는 떨어졌다.

엠마가 강대리를 쳐다본다. 나는 두 사람을 소개했다.



"엠마 비노쉬 박사님. 이쪽은 선미 강. 엠마는 영어로 얘기해라."

"안녕. 반가워요. 엠마라고 부르세요."
"네. 나는 선미입니다. 말로만 듣던 엠마를 집접 만나게 돼서 반가워요.

"아하. 그럼 이 숙녀분께서 상수와 같이 오신 동료분이야?"
"엠마. 그렇기는 한데, 내 느낌은 그 이상 같아."

"셀린. 방금 체크아웃 한 영수증을 보여줄까?
우리는 방을 따로 사용했거든요."

"하아. .. 상수. 방을 따로 썼다고?
그 말이 반드시 서로 다른 침대를 사용했다는 의미는 아니잖아? 하하."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
같은 침대에 있었다고 해서 꼭 침대가 불타는 것은 아니야. 안그래?"

"셀린. 내가 상수를 호텔로 보낼 때마다 상수는 거의 그로기 상태였어. .. 하하하."
"그래도 상수에게는 또 하는 것이 가능했을 껄. 하하."



나는 강대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강대리는 무슨 말인가는 알아듣지 못하지만 웃는 얼굴을 하고 있다. 정말 바보같다. 그러니까 엄청 귀엽다. 강대리는 두 여자가 웃고 있고, 나는 난처해하는 표정을 하자 어리둥절한다. 이 분위기에 반전을 위하여 나는 엠마와 셀린을 향하여 말했다.



"셀린의 차에 이미 우리 짐을 실었거든. 엠마 차는 여기에 세워두고 가자."
"그럼 내가 호텔로에 가서 차를 주차장에 주차하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올께."

"엠마. 그게 가능할까?"

"내가 인포에 있는 여직원에게 아까 쵸콜렛을 줬거든.
내가 보냈다고 하고 잘 말해봐."

"하아. 그 새 덫을 놓았군. 나쁜 남자, 정말 부지런하네."
"덫이 아니라, 이럴 경우에 대비해서. .."

"시끄러워. 더 이상 말하지 마."



엠마의 입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나오자, 셀린은 그만 입을 닫는다. 엠마는 셀린과 함께 자기 차의 트렁크에서 우산을 꺼내서 셀린의 차로 옮겨 싣는다. 엠마와 셀린은 같이 호텔로 들어간다. 셀린은 나에게 따라오라고 눈치를 했으나 나는 무시했다. 잠시 후에 엠마가 나와서 차에 타고, 주차장 입구의 차단기가 올라갔다. 셀린은 우리에게로 걸어왔다. 엠마의 차가 주차장으로 들어가고, 나중에 엠마가 걸어서 우리에게로 온다.

우리는 셀린의 차에 탔다. 셀린의 교통정리를 따라서 엠마는 셀린의 옆자리로 타고, 나와 강대리는 뒤로 탔다. 셀린은 차를 출발시켰다. 호텔 입구에는 아까 그 여직원과 짐을 날라준 남자 직원이 나란히 서서 우리에게 손을 흔든다. 나도 그들이 보도록 손을 흔들었다. 앞에서 엠마와 셀린이 이야기를 한다.



"우리는 가이드 역할을 해야 해."
"안그래도 미운 상수 옆에 앉고 싶지 않았어."

"왜 그러는데?"
"상수가 떠날꺼니까 그러나?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엠마.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아옹다옹 하다가 작별을 하기도 해.
그래야 서로의 기억에 오래 남는대."

"이런다고 나쁜 상수가 나를 기억할 것 같아?"

"엠마. 너처럼 사랑스러운 여인을 어느 남자가 기억하지 않을까?
상수가 너를 기억하는 것도 틀림 없는 일이거든. 그러니까 상수가 너와 계속 만나죠."

"하아.. 셀린. 나 지금 돌겠다."
"엠마. 나도 네 마음을 충분히 이해해."

"고마워. 셀린."



나는 그녀들의 말을 들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셀린은 센느 강변을 따라서 간다. 아직은 도로가 한산하다. 강대리는 창 밖을 구경하기로 마음을 먹었는지, 우리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다. 강대리 나름대로 현명한 결정을 한 것 같다. 앞에서 셀린이 한마디 한다.



"상수. 네가 선미한테 이 지역 안내를 잘 해줘."
"무슨 안내를 하라는 거지?"

"있잖아. 카르치에 라땅이나 뭐 이런 것들."
"엠마는 운전도 안하는데. 엠마가 해.

"내가 한국말을 잘 모르는데."
"영어로 하면 돼."

"셀린 말로는 잘 안되는 것 같다는데?"



셀린은 시떼섬(ILE DE LA CITÉ) 중앙 남쪽에서 좌회전을 하여 생미셸대로(Boulevard Saint-Michel) 로 들어섰다. 지하철 7호선 Censier-Dauberton 역까지 가서 그 근처에 차를 주차하고 우리는 걷기로 했다. 비가 올 것이라는 말은 아직 통하지 않는다. 하늘은 맑고, 흰 구름이 가볍게 둥실 떠있다. 셀린이 물었다.



"상수. 너에게 선택권을 주지. 어디로 걷고싶어?"
"여기로 왔으면, 당연히 무프타 거리(Rue Mouffetard) 아니야?"

"어쩜. .. 우리랑 생각이 같네."



우리는 무프타 거리로 들어섰다. 길가에 내놓은 테이블에서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에스프레쏘를 놓고 앉아서 조용히 그들의 여유를 즐기고 있다. 이들은 가을 햇살 속에서 행복을 이런 여유에서 찾는다. 일할 때에는 부지런히 숨가쁘게 하지만, 쉴 때에는 이렇게 조용하고 여유를 찾는다는 것을 나는 예전부터 부러워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쉬는 것마저 시끄럽고 요란하다. 특히 노래방이라는 곳에서 고래고래 악을 쓰고 광난의 몸짓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것과 이 곳에서 이들이 하는 것과는 근본적인 문화적 차이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들의 마음가짐은 조금씩 늦게 그리고 한가지 덜 하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음식은 오래 기다릴수록 양념이 스며들어 더 맛있다고 한다. 과일도 숙성하는 데에 시간이 필요하듯이 이들은 기다리는 것을 그런 것이거니 하고 받아들인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가능한 한 빨리, 기왕이면 한 가지라도 더 하려고 한다. 우리에게는 여유가 없고, 항상 바쁘다. 더구나 기다리는 것은 우리 나라에서는 가능한 한 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프랑스인들의 여유, 양보 그리고 기다림을 높게 평가하는 편이다. 지하철에서 열차에서 뛰듯이 내린 사람이 계단을 달려 올라오지만 건널목에서는 빨간 신호등 때문에 기다려야 한다. 결국 그들은 뛰지 않고 천천히 올라온 사람과 같이 초록색 신호등에서 건너간다.

날더러 강대리에게 가이드를 해주라는데, 이런 것들을 어떻게 설명하여야 할까? 우리도 식당을 정해서, 식당 밖에 있는 식탁에 앉았다. 우리는 야채 샐러드, 빠뜨, 연어 파스타, 생선 스뜌, 스테이크 들을 주문했다. 음료는 커피와 과일쥬스다. 알코올을 섭취하기에는 대낮이어서 아직은 때가 아니다. 셀린과 엠마는 강대리에게 까르치에 라땅과 이 거리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을 해준다.



"이 동네는 소르본느나 다른 대학와 대학들이 많아. 옛날에는 대학의 공용어가 라틴어였거든. 이 동네에서는 학생들이 많이 살았고, 그 사람들은 이 지역에서도 프랑스어가 아닌 라틴어를 사용했어. 그래서 라틴 지역이라는 뜻으로 카르치예 라땅이라고 불렀어. 지금도 그래."

"외국인 관광객들은 루브르나 교외로 나가면 베르사이유, 아니면 정원 같은 곳에 잘 가거든. 그런데 이런 문화는 힘이나 권력 또는 돈을 가진 사람들이 남긴 문화야. 그렇지만 이 무프타 거리는 옛날부터 가난하고 배고픈 학생들이나 노동자들의 거리였어. 그래서 이 거리나, 이 지역에는 세계 각 나라의 음식들을 싼값에 먹을 수도 있어."

"그럼 이 메뉴들은 어느 나라 음식들이니?"

"선미 너는 이번에 파리에 처음이니까, 프랑스 음식으로 주문했다. 배고픈 대학생들이 먹는 음식들이야. 다음에 오면 더 맛있는 것을 먹기로 하고, 이번에는 이 음식들로 만족해라. "

"엠마. 배고프면 뭐든 다 맛있거든요. 나는 오늘 아침부터 굶었거든. 하하."
"이번에는 상수와 같이 불고기랑 김치찌개를 먹지 못해서 유감이야."

"엠마도 김치찌개를 알아?"
"상수가 요리하면 나는 먹기만 했지. 나 라면도 잘 먹거든요. 하하."



세명의 여자들이 음식을 먹으면서 여자들의 수다를 한다. 나는 이런 것들을 강대리에게 내가 이야기해주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데, 강대리가 이 역사적인 동네를 얼마나 이해할까? 아무튼 먹고 마시면서 우리도 우리의 여유를 가졌다.



"상수. 엠마에게 내 오빠를 소개해주면 어떨까?"
"틀림없이 엠마 마음에 들꺼야. 꼭 시도해 줬으면 좋겠어."

"상수. 너는 가면서 나를 슬프게 할래?"
"그럴 의도는 없어."

"그럼 무슨 소개를 하라는 거야? 너는 셀린의 오빠를 본 적이 있기는 해?"
"몰라서 묻니? 어제 브리옹씨 식당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해봐."

"그 일이라면 내가 너에게 사과를 열 번은 했을껄?"

"사과할 생각을 하지 말고, 그럴 일을 아예 만들지 마.
그러려면 셀린의 오빠를 만나보도록 해."

"너는 정말 나쁜 남자야."



셀린은 우리 모두를 태우고 샤를드골 출국 공항으로 갔다. 나는 강대리와 함께 체크인을 하고, 짐도 부치고, 보드카드를 받았다. 공항 대합실에서 나와 강대리는 휴대전화기를 셀린에게 반납했다.

우리는 아쉬운 작별을 했다. 나는 셀린과도 헤어져야 하지만, 엠마와도 헤어져야한다.



나와 엠마는 서로를 꼬옥 안고 키스했다.



"상수. 내가 하지 못한 이야기는 언제 하지?
나도 제네바로 가면 안돼?"

"또 그런 소리를 해?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
"알았어. 미안해."

"겨울에 엄마 아빠가 서울로 오실 때 같이 오도록 해."
"그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야."

"마음 먹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거든."
"생각해보자."

"엄마 아빠한테 나로부터 인사를 꼭 전해."
"알있어."



엠마가 내게서 떨어지자 셀린이 나를 안는다. 그런데 셀린도 나에게 엠마처럼 내 입술을 빨면서 키스한다.



"서울로 이메일을 보낼께."
"나도 서울에 가면 연락 할께."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분명 사람이 하는 일이다. 그렇지만 내 경험에 의하면 그것은 사람 마음대로 쉽게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만남이 있었듯이 우리는 이제 작별을 하여야 한다. 우리가 헤어져야 우리는 다시 우리가 가던 길을 계속해서 갈 수 있다.

엠마와 셀린은 우리에게 손을 흔들고, 나와 강대리는 제네바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그녀들과 헤어져서 우리의 게이트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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